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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VIETNAM)의 문화

아오자이(ao dai)
모든 민족은 고유한 옷을 입는 방식이나 치장하는 방식을 갖고 있으므로 옷은 민족문화의 상징이다. 베트남의 전통적인 옷을 입는 방식, 치장하는 방식은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 인도인, 태국인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복식과 혼동될 수 없다. 베트남 사람들의 북장의 특징은 자연환경에 의존하여 열대지방의 더운 기후와 수도작(水稻作) 농업활동 두 가지의 요소에 큰 영향을 받았다. 더운 기후 탓에 여러 시대를 거치는 동안 베트남 여성의 평상시 하의는 치마였다. 치마는 동남아 전 지역의 전형적인 의복이었으며 동남아 지역의 몇몇 곳에서 단지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치마를 입었다. 치마는 통풍이 잘되고 더운 기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논에서 작업을 하기에 매우 적당했기 때문이다. 치마는 바지 가랑이가 없기 때문에 논에 들어갈 때 항상 쉽게 걷어 올릴 수 있었다. 이는 기후가 차고, 말을 기리고 타는 주앙 아시아의 유목생활에 기원을 두는 바지와는 완전히 다르다.

여성의 상의에서도 가장 변화지 않는 것은 가슴을 가리개인 옘(yem)이다. 옘은 여성의 가슴을 덮는 사각의 천으로 각 모서리가 십자가 되도록 착용하며 위쪽의 모서리는 목을 파고 두 개의 허겊 끈을 달아 목 뒤에서 묶으며, 대칭되는 두 개의 모서리는 옆구리 쪽으로 두 개의 헌겇 끈을 달아 등뒤에서 묶고, 이 네 개의 끈을 자이 옘(dai yem)이라 부른다. 이것은 베트남 사람의 특수한 의복으로 목의 모양은 여러 가지가 있고, 색상도 다양하다. 베트남 여성은 그늘에서 일을 할 때, 옛 전설의 왕조 때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보틍은 치마와 옘을 입고 두 팔과 등을 노출시켰다.

유목 생활에 기원을 둔 바지가 베트남에 날이 갈수록 많이 유입되게 되었다. 베트남에 처음 들어왔을 때, 추운 지방의 통이 좁고 밑위가 짧으며, 두꺼운 재질로 만든 바지는 본래 달렸던 벨트가 없어지고 바지 허릿단이 바깥쪽으로 늘어지는 바지로 변형 되었다. 그것은 일을 하러 갈 때 입는 바지의 종류로 바지 통은 넓으며(시원하도록), 밑위가 길고 허릿단 넓어 논일을 하러 물에 들어갈 때 허리 부분을 끌어올리거나 내리는 방법으로 쉽게 바지 길이를 짧게 하거나 길게 조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각 민족의 대표적인 의복은 이러한 일상적인 의복이 아니라 아름다운 의상으로 의식과 축제가 있을 때 입는 의복이다. 축제 때, 베트남 사람들은 보통 아오 자이를 입는다. 이는 마 도안 럼(Ma Daon Lam)의 중국 문헌 통고(通考)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옛날 交趾(베트남)에서는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은 아오 자이를 입는다. 축제 때는 어두운 색의 네 자락으로 이루어진 아오 뜨 턴이라 부르는 넓은 옷을 덧 입는다."

양밑이 빠져있는 대나무통 같은 치마는 베트남에는 있으나, 중국에는 없다.
의식과 축제 때 남성들은 검은 색이나 갈색의, 보통은 얇게 짠 검은 옷인, 아오 테 템이라 불리는 아오 자이를 입는다. 속에는 아래쪽에 두 개의 주머니가 달린 짧은 상의인, 아오 응안을 입는데 엉덩이 양쪽 부분으로 트여 있거나 혹은 트여져있지 않을 수도 있다. 북부에서는 아오 까인(ao canh) 남부에서는 아오 바 바(ao ba ba)라 불린다. 하의는 흰색의 바지를 입는데, 단정하게 밑위가 짧아 보기에 좋은 응서바지라 불리는 아름다운 바지이다.

서구와 교류의 영향으로, 20세기 초부터 전통 아오 자이는 점점 개량되었다. 30년대부터 깟 뜨엉(Cat Tuong)과 레 포(Le Pho)라는 두 화가이 새로운 아이디어로 아오 뜨 턴은 개량되어 허리가 넓은 것, 허리에 꼭 맞는 것 등 다양한 종류를 가진 두 자락으로 이루어진 아오 자이가되었다. 라글란 소매, 퍼프 소매, 부푼 소매, 연꽃잎 모양이 목, 배 모양이 목, 하트 모양의 목 등 이 시대 초기 단계의 아오 자이 스타일들은 일반적으로 'Le Mur'라고 불리었다. 레 부르는 화가 깟 뜨엉의 이름을 불어로 번역한 '벽'이란 뜻이다. 그러나 까뜨엉의 월남어 뜻은 '행운, 혹은 길조"라는 뜻이다. Le Mur 옷은 개선되어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신식 아오 자이로 바뀌었다. 아오 자이는 아래와 같은 점을 포함하여 서구식의 직접적으로 신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경향이 강해지는 방향으로 변화 되었다.
  1. 색상의 다양화로 어두운 색상에서 벗어남
  2. 몸에 달라 붙도록, 가슴이 두드러지고, 허리부분이 꼭 맞도록 단정하게 만들어짐
  3. 옆구리의 트임이 위로 더 높아져 옆구리의 갈비뼈 부분이 드러남
  4. 부드럽고 얇은 천으로 만들어짐
  5. 아오 까인과 안에 입는 옘이 없어지고, 서구에서 유입된 브래지어로 가슴을 정리함.

논 라(non la)
베트남 사람들은 머리에는 보통 칸(Khan)이라고 하는 수건을 둘렀다. 옛날 여성들은 머리를 길게 길렀고, 긴 천 조각을 사용하여 머리를 말아 그것을 머리 위에 감아 올렸는데, 이를 번 똑(van toc)이라 불렀다. 이때 귀 옆의 머리를 약간 밖으로 나오도록 하였는데 이를 닭의 꼬리와 모양이 비슷하다고 하여 똑 도오이 가(toc duoi ga)라고 하였다. 번 똑(van toc) 위에 덮을 수 있는 것으로 추운 계절에 사용하던 네모난 천이 있는데 이를 칸 부옹(khan vuong)이라고 하며, 까마귀 주둥이 모양으로 머리에 질 끈 메었는데, 앞 쪽으로 뽀족한 부리 모양을 하고 있고, 턱 아래로 양 끝을 동여 매었다. 더운 계절에는 위에서 볼 때에는 옛날 동전 모양으로 보이게 끔 칸 부옹을 둘렀다.

이러한 수건(khan) 위에다, 혹은 그것을 대신하여 비와 햇살을 막지 위해 사용하던 것으로 논(non)이라고 하는 삿갓이 있다. 이 논(non)을 나타내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단어들이 있었고, 오직 이 논을 부르는 호칭법이나 논의 모양새 등을 통하여 사회에서의 모든 계층, 직위가 드러났다. 논의 종류는 아래와 같다.
  1. 논 메(non me): 논 메는 낡고, 태가 없으며, 꼭지 부분에 구멍이 난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이삭줍기를 하러가거나, 소라를 줍거나, 소를 몰고 나갈 때 썼던 것이다.
  2. 논 꾸리 바쑤(non culi ba xu): 시클러 운전사가 쓰는 론이다.
  3. 논 린( non linh) 군인들이 쓰는 논으로 접시를 머리에 뒤집어 놓은 것 같은 모양으로 대나무 가지를 엮어 만든 것으로 논 저우(non dau) 라고도 부른다.
  4. 논 응에(non nghe), 논 니 톤(non nhi thon) 논 바 떰(non ba tam)은 나이 많은 여성들이 주로 사용하였다.
  5. 논 뚜 로(non tu lo)는 스님들이 쓰는 non으로 대나무 잎으로 만든다.
  6. 논 즈어(non dua)는 관리들이 사용한 non으로 작은 파인애플 잎들을 섬세하게 짜서 만들었다.
  7. 논 롱 짱(non long trang)은 높은 관직에 오른 관리가 쓰는 non으로 꼭지가 금으로 장식되었다.
  8. 논 즈어 후에(non dua Hue)는 여류 문인들이 즐겨 쓰는 non인데 가볍고, 고상한 느낌이 나는 것이다.
  9. 옛날에는 상기와 같이 다양하게 구분하였으나 현대에 와서는 두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논 통(non thung)으로 넓적한 그릇모양의 논이다. 폭이 크고 넓으며, 위쪽은 하나의 큰 접시처럼 둥글고, 평평하며 논의 챙은 위로 솟아 올라 전체를 등글게 감싸고 있다. 논의 안쪽 면 태두리에 대나무로 짜여진 꾸아(qua)가 사람의 모리에 논을 꼭 맞도록 하여준다. 논 퉁은 일반적으로 논 무어이(non muoi) 논 녀(non nho), 논 더우(non dau ) 세 종류로 세분화 된다.
    둘째, 논 쩝(non chop)은 우리가 베트남에서 주로 보는 원뿔형 논이다. 옛날부터 남성들이 사용하던 논 쩝은 일반적으로 길고, 무거우며, 끝이 뾰족하게 만들어졌지만, 평평하고 앝았고, 반드시 끈은 대나무를 엮거나, 길게 짜여진 천으로 만들어져야 튼튼한 논이 되었다. 여성들을 위한 논 쩝은 더 가볍고, 얇고, 속이 더 깊었으며, 논 꿉(non cup)이라고 불리운다.

베트남 생활문화 속에서 식물이 역할
1. 대나무
대나무를 표현하는 말은 영어는 bamboo, 중국어는 竹 한국어는 대나무라고 한 단어 밖에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은 대나무가 어릴 때는 망(mang)이라 부르고, 자라게 되면 각기 다른 수십종의 이름으로 불려진다. 즉 쩨(tre), 느아(nua), 쭉(truc), 마이(mai), 버우(vau), 지앙(giang), 브엉(buong), 흡(hop)이라고 종류 별로 나누어서 부른다. 이것은 베트남이 대나무를 생활 속에서 매우 유용하게 사용하므로 대나무의 이름을 생활 속에서 호칭할 필요성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트남사람들이 나무집을 짓을때는 나무와 대나무만을 이용하여 집을 짓는다. 쇳못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대나무 못을 사용한다. 그런 것으로 볼 때 베트남인들은 생활 속에서 나무의 특성을 잘알아 사용하고 있다.

2. 벼
수도작 문화의 베트남은 벼에 의존도가 매우 높은 나라이다. 따라서 벼에 대한 칭호도 다양하다. 벼가 어린 모종일 때는 마(ma), 그 키가 자란 것은 루어(lua)라고 한다. 꽃이 핀 벼 이삭은 동(dong)이라 고 구별하여 부른다.동남아시아는 가장 오래된 농경 지대 중의 하나이다. 동남아에서 맨 먼저 채취하여 재배하게된 식물은 뿌리를 얻기 위한 식물들이었다. 씨앗을 심는 농업은 이보다 훨씬 뒤늦게 알게 되었는데, 기원전, 4,000년 내지, 3,000년 경이다. 현재에도 많은 자료에 중국이 벼 경작의 발상지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고대중국은 황하강 유역에서 주로 기장과 보리 농사를 지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후 한(漢)족들이 고대 동남아시아 지역에 속하는 화남지역을 차지하면서 비로서 벼 농사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베트남인과 동남아시아인들은 벼를 재배하는 법을 발견하였을 뿐 아니라 일찍이 이모작 기술을 터득하였다. 異物誌와 水耕註에는 "교지에서 벼가 일년에 두 계절 익는다."라고 기록 되어 있다.

베트남의 음식문화
1. 채소음식 문화
베트남은 지형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베트남에는 식물이 매우 풍부하기 때문에 고대 베트남 사람들은 수렵생활 바다는 채집생활을 통해서 생활하였다. 현재까지도 베트남의 산간지역에서는 채집하는 일이 아직도 생활 방편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로 간주하고 있다. 죽순 요리를 예를 들면 같은 종류의 죽순이라도 일 년에 서로 다른 시기에 따라 각 종류의 죽순의 가치는 다르다. 그 예로 vau 죽순은 3~4월의 것을 최고로 치며, nua죽순은 6~8월의 것을, buong죽순은 7~8월의 것, giang죽순은 8~9월의 것이 제일 좋다. 이 처럼 베트남에서 야생식물들을 계절, 부위별, 향에 따라 분류하여 사용하고 있다. 베트남인들의 식사에서 생선과 고기는 없어도 되지만 어느때고 야채는 빠진 적이 없다.

2. 과일즙 문화
중국의 북방민족과 서양인은 우유를 마시는 것 처럼 베트남인들은 식물에서 짠 즙들을 마신다. 베트남인들은 차(che), 사탕수수즙, 코코넛 즙등 다양한 과일 즙을 마신다.

3. 빈랑(cau) 열매
중국의 초목장(草木狀)이란 문헌에는 交趾사람들과 廣사람들은 결혼을 할 때나 손님을 접대할 때 빈랑을 내놓는다. 사람들은 서로 만났을 때 쩌우(trau)를 씹지 않으면 매우 섭섭하게 생각한다".라고 쓰여져 있다. "떤랑(tan lang)열매를 먹으면 쓰고 신맛이 난다. 그러나 쩌우(trau:구장)와 같이 먹으면 그런 맛이 없어지고며, 칼슘 성분의 회(voi)와 같이 씹으면 향기가 나고 맛이 있으며, 기(氣)를 내리고 소화가 잘된다."라고 하였다. 현대에도 시골 결혼식에 빈랑열매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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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VIETNAM)의 역사

구석기 시대와 선사문화
베트남의 선사문화
구석기 유적이 상당부분 존재하는 것으로 연구되었으나 오랜 전쟁기간으로 인하여 아직 제대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남베트남에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선사시대의 유적들이 북베트남에서 홍하 삼각주를 중심으로, 그리고 남베트남에서는 메콩 삼각주를중심으로 분포하였다.

청동기 시대, 반랑국의 동손문화
초기국가의 성립과 관련되 문화인 동손문화는 중국 청동기 문명의 영향으로 성립된 것으로서, 신화적으로 구전되어 오는 반랑(Van Lang)이 초기국가로 고려되고 있다. 그 연대는 기원전 3000년 정도라는 설이 대두되었다. 초기국가의 전통은 우리나라의 경우와 매우 유사하다. 청동기가 번성하는 동손 문화 이전인 기원전 2000년경에 국가의 형태가 출현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동손 문화의 형성은 홍하텔타의 주민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이텔타 지역의 주민들은 오늘날 베트남 민족의 조상이 된다.

반랑국의 건국신화
중국신화에 나오는 신농씨(神農氏)의 자손 중에 한 무리가 남령 산맥에 이르렀고, 그의 자손들은 이 지역을 북방과 남방으로 구분하여 다스렸다. 베트남 역사의 무대인 홍하유역은 서북쪽이 중국의 티벳 고원과 운남성으로 통하고, 동으로는 남지나해에 통하는 중간 위치에 있어서, 이 지역은 일찍부터 북방민족과 남방민족의 가축장이었다. 베트남인들은 자신을 남방민족으로 인식하고 중국인과 구분하였으나, 신화를 통해서 두 민족의 조상을 동일시함으로써 자기들 역사의 기원을 중국역사의 상한선까지 확대시키려고 하였다.

락롱권과 어우꺼 신화
베트남인들은 락롱권과 어우꺼를 자신들의 시조로 생각한다. 북베트남 남방에 신농씨 후손들이 세운 나라인 적귀(赤鬼)국은 락롱권 시대에 여러 제도를 완비하고 농경을 가르치는 등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북으로부터 침입이 있자 적장의 부인인 어우거를 유인하여 적장을 실의에 차서 물러가게 했다. 이 어우꺼가 알을 하나 낳았는데 그 알로부터 1백 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이중 50명은 락롱권을 따라 바다로 가고, 나머지 50명은 어우꺼를 따라서 산에 머물렀다. 산에 남은 50명중 가장 강한 자가 홍부엉(雄王)이 되어 나라이름을 반랑(文郞)국이라 하였다.

어우락국(蜀氏王國)
어우락국은 안즈엉브엉(安陽王)에 의해 세워졌다. 안양왕 툭판은 기원전 257년 반랑국을 정복한 후, 이를 자기 나라에 병합하여 어우락국을 세웠다. 중국의 浙江省으로부터 북베트남에 걸친 넓다란 지역에 百越이라는 여러 종족이 살고 있었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이 종족들을 복속시켜 나갔는데, 이들이 남하 후 락족과 융합하여 어우락국을 형성하였다. 안즈엉브엉은 진(秦)의 군사적 위협을 물리치고 경제적으로 윤택한 평야지대를 찾아 남으로 옯겨서, 오늘날의 푹옌(福安)성 꼬로아에 도읍을 정했다.

남비엣(南越)국
기원전 214년 중국 진시황제의 남월정략에 이해서 중국의 지배가 천년을 넘게 지속된다. 기원전 207년에 진나라 남부지방 군수의 후계자였던 찌에우다(趙陀)는 지금 중국의 광서성과 광동성을 중심으로 남월국을 세웠다. 찌에우다는 자신을 황제로 칭한 후 중국의 호남 성을 침범하기도하고 때로는 신하의 예를 갖추기도 하였다. 그는 한나라와 대립하면서도 주변지역으로 세력도 확대하였다. 찌에우다는 어우락국을 홍하델타 중심부의 자오찌(交趾)국과 델타유역 남부 마강의 끄우쩐(九眞) 군으로 나누어 지배하였다. 기원전 137년에 세상을 떠난 찌에우다는 중국과 대립되는 왕조를 세운 사람이었기에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위대한 황제로 여겨졌다.

한(漢)나라의 점령
남비엣국의 친한파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한무제는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려고 하였으나 반기를 들자 기원전 111년에 남비엣국을 멸망시켰다. 한나라의 행정력은 이들 지역에 직접적으로 미치지는 않았고, 토착지배층은 거의 독립하여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주민을 지배하였다.

마원(馬援)의 개혁정치
후한 원정군의 장수였던 마원은 베트남에서 많은 개혁정치를 행했는데, 이는 베트남역사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후한은 베트남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인 직접지배를 행하고 토착 풍습 대신에 새로운 한나라의 법률제도를 도입하였다.

사섭의 치세
사섭(士燮)은 오나라와 손잡고 토착사회와의 협조하에 도읍을 델타 북부의 산간지대인 롱비엔으롱부터 델타 중심부인 루이러우로 옯겼다. 사섭은 유교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불교를 장려하였기 때문에 그의 시대에는 불교가 융성하게 되었다.

남베트남의 힌두 문화
북베트남이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것과는 달리 남베트남에서는 더 오랫동안 선사시대가 지속된다. 그후 남베트남은 베트남 서쪽 인도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문명세계에 동참하기 시작한다. 이 지역에서는 1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옹에오(Oc Eo) 문화를 꽃피운다. 진나라가 망하자 중국에서는 베트남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고 베트남의 변경이 인도문화에 영향을 받은 참족의 나라인 임읍의 침입을 받았다. 임읍(林邑)은 중부 베트남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交趾군의 대부분을 공격하였다.

도비엔(杜氏)의 등장
북베트남에 교지태수로 있던 도비엔은 임읍군을 맞아 열심히 싸웠고 마침내는 이들을 완전히 물리칠 수 있었다. 443년에는 송나라 조정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베트남을 침공하는 임읍의 군대를 도벌하였다. 지금의 후에 부근에 있던 임읍의 수도를 함락시켜 쇠약해진 임읍은 수도를 지금의 다낭 부근인 짜끼에우로 옯겼다.

리본의 반란
쭝자매 이후의 최대규모 반란인 중국계 토착호족 리본이 반란을 일으켰다. 양나라의 베트남 남과 북의 침입을 막아낸 그는 544년 반쑤( 萬春)국을 세우고 황제를 칭하였다. 이는 중국계의 토착세력과 순베트남 토착세력이 결합이었다. 그러나 547년 양나라의 군대에 패배하여 리본의 꿈은 무산되었다.

남베트남의 참문화
7,8세기에 남베트남에서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참(Cham)문화가 융성하였다. 남베트남 메콩델타의 역사는 인도문화의 불교와 힌두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9세기 무렵의 중부 베트남은 인도네시아에 근거를 둔 수라바야왕국에게서 참 문화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풍홍시대
토착귀족의 군대가 도호부에 저항하기 시작하였고 이 저항의 지도자는 풍홍이라는 호족이였다. 풍홍은 이후 7년간 베트남을 다스렸는데, 그는 일반백성들에게 기반을 둔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베트남의 다이라 양식
高騈의 현명한 치세로 반당운동은 자취를 감추고 번영을 누렸다. 이때에 발달한 예술양식이 다이라 양식인데, 이 양식은 고변의 다이라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후대 베트남 예술양식의 원형을 이룬다. 875년에는 당나라에서 黃巢의 난이 일어나서 베트남에 대한 당의 통치는 이름만 남고 실질적인 지배는 종말을 고하였다.

베트남 독립왕조의 출현
고왕조(吳王朝 939~965)
고꾸옌은 스스로 왕을 칭하고 이전의 베트남 지도자들이 가졌던 절도사라는 칭호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베트남 최초의 독립왕조가 성립된 것이다. 고꾸옌은 도읍을 다이라 성에서 베트남 고유 왕권과 관련 깊은 옛 도성인 꼬로아로 옮겼다. 그러나 그는 중국문화에 영향을 받아 중국제도를 답습하였다.

딘 왕조( 丁 王朝 966~980)
딘보린은 십이사군의 전란시대의 혼란에서 베트남을 다시 통일로 이끈다. 이는 서민출신으로 그 자신을 대승왕이라고 칭하였다. 그는 나라이름을 다이꼬비엣이라고 하고 토착세력 지배하에 있는 호아르에 도읍을 정했다. 그는 형벌을 엄하게 하여 사회혼란을 종식시키려 노력하였다. 970년 베트남 최초의 연호 太平을 사용하였고 문무백관의 직제를 만들었다.

레 왕조(前 黎, 980~1009)
딘왕조가 내분을 보이자 송나라는 침입을 하였다. 대장군 레호안은 출전에 앞서 어린 황제 대신에 자기에게 왕위를 줄 것을 요청하였고, 황제의 옹호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여졌다. 그는 大行皇帝라고 칭했는데 이로써 前黎왕조의 출현이 이루어진다. 그는 중국문화와는 거리가 먼 인물로 순수토착 세력이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은 집단을 제거했던 것이다. 그 후 레호안은 남베트남의 참파국 인드라푸라에 쳐들어가 약탈하고 포로들을 잡아 귀환하였다. 참파왕국은 988년 수도를 훨씬 남쪽에 위치한 빈딘 근처의 비자야로 옮겻다. 레호안은 베트남 주화를 최초로 만들고 친위군대인 天子軍을 만들었다.

리 왕조( 李 王朝 1010~1225)
장군이었던 리꽁구언이 관리와 승려의 지지를 얻어 황제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李太祖이다. 리왕조는 1009~1225년의 베트남 최초 장기왕조로서 200년 동안 존속하였다. 리왕조가 존속하는 동안 역대 황제는 불교를 신봉하고 보호하여 왕조의 영속을 꾀하였다.

聖宗 (타인똥 1054~1072)
타인똥은 재위하면서 나라이름을 다이비엣(大越)이라고 하였다. 그의 치세 중에 중국문화의 전통은 더욱 적극적으로 이식되었다. 그러나 유학의 보급은 아직 초기단계에 머물렀고 불교가 정치의 지도이념으로 지배하고있었다. 1069년 참파를 침공하여 도읍인 비자야를 함락시키고 왕을 포로로 잡음으로써 참파의 3개주를 할양받았다. 이는 베트남 역사의 남진에 중요한 사건으로서 베트남의 영토는 처음으로 중부베트남까지 확대되었다.

쩐왕조(陳, 1225~1400)
리왕조의 외척이었던 쩐(陳)씨들에게 제위가 넘어갔다. 쩐왕조는 1226년1월에 성립되어 2백년 가까운 장기간에 존속하였다. 강력한 정치제도와 군사조직에 힘입어 세차례에 걸친 몽고의 침입을 물리쳤고 남으로는 그 영토를 전보다 더욱 확대하였다. 쩐왕조는 황제에게 권력이 집중된 왕조체제였다.

호 왕조(胡 王朝 1400~1407)
레뀌리는 쩐왕조의 예똥의 비호하에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예똥의 사후에 황제들을 페위시키고 1400년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레뀌리는 유능한 장수는 아니었으나 베트남의 정치사상 가장 현실감각이 뛰어난 지배자였다. 그는 정치, 경제, 군사 등 각 방면의 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는 베트남 최초의 지폐를 만들었고, 레뀌리는 제위에 오른 후 나라이름을 다이우로 바꾸고 자신의 성도 胡씨로 바꾸었다. 1402년 참파군을 대파하여 지금의 꽝아이 지방을 할양받았다.

후기쩐 왕조(後陳, 1407~1413)
명나라 영락제는 1406년 20만의 원정군을 출동시켜 호군을 격파하고 호뀌리 부자를 포로로 잡았다. 베트남을 점령한 명은 이곳의 이름을 交趾로 바꾸고 명나라에 귀속 시켰다.

레 왕조( 後 黎 1428~1524)
명나라의 지배는 결코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여러 지방에서 전개되는 저항운동에 부딧쳤다. 1418몀 타인호아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킨 레로이(黎利)는 오랜 저항끝에 명의 군대를 물리치고 베트남의 독립을 되찾는데 성공하였다. 레왕조는 베트남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왕조로서 유지되었다. 레로이는 1418년에 平定王이라 칭하고 명에 대한 10년 동안 투쟁을 하였고 유능한 전략가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명의 영락제가 죽자 약해진 명나라군사를 무찌르고 1428년 東部에서 즉위하여 나라이름을 大越이라 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막왕조(幕 1527~1592)
막단증이 1527년 레 왕조의 제위를 찬탈하였다. 레왕조는 9대 1백년간의 왕조를 일단 내렸다. 막왕조 3대 막폭구엔을 마지막으로 1592년 막이 내렸다. 구엔껌이 살해되자 그 사위인 찐끼엠(鄭檢)에게 제위가 넘어갔다.

쩐 왕조(1539~1787)와 구엔왕조 (1558~1778)의 남북대립시대
16세기에 들어 대립과 분열의 상황은 레왕조의 증흥 후에도 계속되었다. 다시금 찐과 구엔 양씨에 의한 남북대립이 시작되었다. 레왕조의 황제는 부아(帝王)를 칭하고 다이비엣 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실권은 쭈아(主)라고 불리는 북쪽의 찐(鄭)씨와 남쪽의 구엔(完)씨에게 있었다. 이들은 1672년~1672년 동안 7차례 교전이 있었지만 1672년 Song Gianh강을 경계로 휴전하였다.

프랑스의 포교
16세기 중엽부터 선교사가 베트남에 활동하였고, 17세기에는 예수회 신부들이 돌어와 활약하였다.이 당시 활약하던 알렉상드르 드 로드( Alexandre de Rhodes, 1591~1660) 프랑스신부가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여 오늘날 베트남어가 되었다.
타이손 왕조(西山, Tay Son 1788~1802) 구엔씨 지배하의 뀐년 인근의 타이손 마을에서 구엔씨 3형제가 반란을 일으켜 구엔씨와 찐씨를 차례로 무너뜨렸다. 이들은 레 왕조까지도 멸망시키고 새 정권을 수립하였다.

구엔 왕조(阮, Nguyen 1802~1945)
구엔 푹 아인은 1803년 청나라에 사절을 보내 越南國王에 봉해졌다. 오늘날의 베트남이라는 명칭도 이때에 생겨났다.

프랑스 식민지
1847년 프랑스는 천주교 박해와 선교사 살해를 이유로 베트남을 침공하게 된다. 1859년~1946년까지 87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된다.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하여 일본이 베트남에 침공하여 일본의 가혹한 공출로 1945년 한해 2백만명이 굶어죽게된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호치민은 8월 혁명을 성공시키고 베트남 민주공화국( 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을 세운다.

프랑스 재침입
2차 세계대전 종전후 1946년 9월에 베트남을 되찾기 위해 프랑스권이 다시 쳐들어왔다. 1946년12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게 된다. 그러나 1954년5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권이 패하여 1954년7월 제네바 휴전협정을 맺고 물러나게된다. 이 전쟁 이후 17도선 이북에는 호치민 공산정권이 남에는 고딘디엠 정권이 수립된다.

사이공 함락
1975년 4월30일 탱크부대를 앞세운 월맹군이 사이공 대통령궁을 점령하여 30년 전쟁을 끝으로 통일이 된다.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Social Republic of Vietnam)
1976년 4월25일 총선에서 수도를 하노이로 결정하고 사이공의 공식명칭은 호치민시로 개칭하였다. 1977년9월에 UN에도 가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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