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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문화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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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CAMBODIA)의 문화

캄보디아는 수세기에 걸져 형성된 풍부하고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자랑한다. 오랜 세월 동안 불교와 힌두교가 접목되면서 캄보디아인들 만의 독특한 전통을 만들었다.


인사문화 삼빼아(Sampeah)
    캄보디아인들은 삼빼아라는 독특한 인사법이 있다. 인사를 할 때는 두손바닥을 가슴앞에 모으고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쯤라읍쑤어(Chumreap Suor)라고 말한다. 손을 높이 올리고 고개를 더 깊이 숙일수록 보다 공손한 인사라고 생각한다.

전통춤 압사라 댄스( Apsara dance)
    캄보디아 전통 춤인 압사라 댄스는 앙코르 사원벽에 남아 있는 천개의 압사라조각에서 형식를 보고 만들었다고 한다. 이 춤은 1960년대 크메르왕실 발레(Khmer Royal Ballet)로 처음 개발하였고 최초의 왕실발레리나는 노르돔 시아누크왕의 딸인 노르돔 보파데비(Norodom Bopha Devi)공주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이 춤은 천년이 넘게 크메르 문화의 일부를 차지한 춤이였으나 유실되어 1960년대 복원한 것이다.

크메르 무술(Khach Kun Khmer Boram)
    크메르 무술은 앙코르 사원에 남아 있는 조각에서 발견할 수있다. 그 대표적인 것을 소개하면
    ⑴ 보까또르(Bokator)
    보까또르는 손과 손으로 싸우는 전투기술과 무기등을 사용하는 전투 기술이 있다. 앙코르시대에 군인들이 접근전에 사용하던 싸움 기술이라고 한다. 보까또를는 무릎, 팔꿈치, 손, 발, 머리등 몸 전체를 사용하는 전투기술이며 짧은 막대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⑵ 바옥 짬 밥( Baok Kckhambab)
    바옥 짬 밥은 크메르 레슬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두명이 겨루어 상대의 등을 바닥에 먼저 눕히면 이기는 경기로 우리의 씨름과 비슷하다. 한 경기는 삼판으로 결정하며 이중 2판을 먼저 이기는 자가 승리한다.

크메르 결혼식(Khmer Wedding)
    캄보디아의 전통 결혼식은 3일 밤낮 동안 다양한 의식이 계속된다. 신랑과 신랑 가족이 지참금과 선물을 실고 신부집으로 가면 결혼식은 시작된다. 가족과 친지 들이 초대되고 결혼반지를 교환한다. 전통적으로 이 첫번째 의식에서 세 곡의 전통노래가 나온다. 첫번째 곡은 신랑의 도착을 알릴 때 다온다. 두번째 곡은 지참금을 발표할 때 나온다. 세번째 곡은 노인들에게 빈랑나무 열매를 씹도록 청할 때 나온다. 그리고 나면 다도(茶道) 의식이 시작되는데 신랑과 신부가 조상들의 영정에 차를 올린다. 두번째 의식은 신랑과 신부가 부부로서 삶을 시작하는 의미에서 이들이 머리카락을 자르는 시늉을 하여 남편과 아내로서의 새로운 관계 시작을 알린다. 주례가 첫번째 머리카락을 자르는 의식을 거행하고 차례로 신랑•신부의 부모 친척 친구 순서로 축복을 기원하여 준다.결혼식의 마지막 부분은 가족과 친구들이 신부와 신랑의 양쪽 손목에 ‘축복의 끈’을 묶는 것이다. 징을 크게 울리고 함성를 올리면서 행복, 건강, 성공, 풍요, 영원한 사랑를 기원한다. 그리고 나서 야자꽃을 새로 탄생한 부부에게 던지면서 전통 노래를 부른다. 신랑과 신부로 선언하고 나면, 신랑이 신부이 옷자락을 잡고 전통 노래가 올려 퍼지는 가운데 신부의 방으로 들어간다. 이 결혼의식이 마무리되고 나면, 모든 하객이 피로연에 초대되어 전통 악기의 연주를 들으면 연회에 참석한다.

캄보디아의 물축제
    물축제는 설날과 함께 최대의 명절로 꼽히며, 국왕이 직접 나와 참가하는 가장 크고 화려한 축제중의 하나이다. 이 축제는 똔래삽 호수가 역륙하여 메콩강 수위가 낮아지는 10월말 혹은 11월초에 매년 3일간 열린다. 캄보디아 수도인 프놈펜에서 수백척의 배들이 경기에 참여한다. 캄보디아에서 물축제가 시작된 것은 약 1,000년이 되었다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1181년 자야바르만 7세가 참족과 해상전에서 승리 한 것을 기리기 위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물은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다.’라는 신앙심에서 시작되어 사람들이 강에서 목욕하거나 수영할 때 방뇨를 하게되는데 그것을 사죄하기 위해서 물축제를 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캄보디아인들의 순박한 마음을 알수 있는 부분이다.


   
캄보디아(CAMBODIA)의 역사

후난 왕조
    캄보디아의 역사는 동남아시아와 인도 사이에 무역과 교류가 시작된 기원 전후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역사학자들은 본다. 물론 그 이전에 이곳에 사람들이 거주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라가 세워진 것은 이때 부터라고 추정하고 있다. 1세기경에 메콩 강 유역에서 인도 힌두 문화의 영향을 받은 후난(扶南)의 건국이 캄보디아 역사의 시작이다. 이 국가는 1세기에 카운딘야(Kaundinya)라는 인도의 한 브라만에 의하여 건립된 동남아시아 최초의 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후난(Funan)이라는 문자는 동남아시아나 인도문화권에서는 찾아볼수 없고 단지 중국 문헌에 扶南이라는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그 당시 중국상인들이 후난(扶南)왕국과 무역하면서 문서에 기록하기를 그나라사람들이 말하는 나라이름을 쓰지않고 그냥 ‘평화로운 남쪽나라’라는 의미로 ‘扶南’이라고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후난을 굳이 ‘크메르’ 혹은 ‘프놈’이라는 말을 한자로 적었다고 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후난국의 건국신화는 다른 불교국들의 불교설화와 유사하다. 인도의 브라만(Brahman)인 카운딘야라는 사람이 ‘배를 타고 동쪽으로 떠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험한 향해 끝에 캄보디아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때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작은 배를 타고 그를 영접하였는데, 그녀는 캄보디아를 지배하는 ‘버들잎의 여왕’이라는 뱀신의 딸이었다. 이 여자는 카운딘야가 타고 온 배를 빼앗고 그를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카운딘야가 마법의 화살을 쏘자 그녀는 즉시 항복하고 말았다. 그 후 이들은 결혼을 하였는데, 이들사이에 태어난 사람이 후난 국왕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후난 왕국은 반세기 이상이나 번영하였다. 그들은 치수와 운하이 건설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메콩강의 골짜기는 풍요로워지고 또한 운하를 통한 상업활동이 활발해졌다.

첸라(Chenla, 627~802) 왕조
    7세기초에는 후난의 제후국이던 첸라( 眞臘)국이 후난국을 멸망시켰다. 첸라는 ‘캄보디아’라고 불렀다. 8세기경 한때 캄보디아 지역은 자바섬 출신의 이민족에게 정복을 당하기도 하였다.

앙코르(Angkor, 802~1500) 왕조
    802년~1500년에 자야바르만 2세는 캄보디아지역을 통일하여 그 후 6백년 이상이나 번영을 누린 앙코르 왕국의 기초를 다졌다. 그는 ‘승리의 수호자’ 자야바르만 2세로 불리웠다. 그는 군사적 천재성과 함께 행정적인 수완을 발휘하였다. 825년경에는 그는 앙코르 평야가 내려다 보이는 프놈 크렌( 크렘산) 위에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는 신성한 산인 메루(Meru)산 처럼 높은 산의 꼭대기에 신이 머문다를 힌두교의 전설에 따른 것이다. 자야바르만 2세는 마술에 능한 힌두교의 승려 1명을 인도에서 불러들여서 그 자신의 지위를 신격화하였다.그는 프롬크렌이 요새로서는 입지가 뛰어나지만 농사에는 부적당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곳에서 약 30km 남동쪽 앙코르 평야로 도읍을 옮겼다.그후 인드라 바르만 1세(877~889), 아쇼바르만 1세(889~900), 수리야바르만 2세, 자야바르만 7세등 훌룡한 왕들이 나라를 다스렸다.

문둥병 왕의 전설
    앙코르국의 왕가는 문둥병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아쇼다라푸라를 세운 아쇼바르만 1세가 문둥병 환자였다는 것이다. 아쇼바르만은 숲속에서 큰뱀을 만나 격투 끝에 그 뱀을 죽였는데, 이때 뱀이 내뿜은 피가 붉은 얼룩이 되어 아쇼바르만을 덮었고, 이 때문에 그는 문둥병에 걸렸다고 한다. 이후 아쇼바르만의 이름은 불길하다고 하여 왕들은 그의 이름을 따리지 않았고, 앙코르 톰을 세운 자야바르만 7세도 문둥병 때문에 죽었다는 설이 있다. 그가 일생 동안 수많은 병원을 전국 각지에 세웠던 것도 문둥병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베트남과 태국이 침임(15~17세기)
    15세기 이후에 캄보디아는 동쪽의 베트남과 서쪽의 태국으로부터 잦은 침입을 당하였다. 15세기 중엽에는 태국의 침입을 받아서 수도 앙코르를 포기하고 현재의 수도인 남쪽의 프놈펜 지방으로 옮겼다. 주변국가들의 융성으로 캄보디아는 베트남•태국 간의 패권 쟁탈전에 시달려야 했다. 17세기는 베트남과 혼인정책으로 명맥을 유지하였고, 1834년에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직접 통치하기도 했다.

노로돔(Norodom) 왕
    1860년에 폭동으로 노로돔 왕은 방콕으로 피신하였고 2년 후 다시 왕좌에 복귀하였으나 왕권은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1863년 태국의 침입을 프랑스이 도움으로 물리쳤으나, 이후 프랑스의 영향을 받게 되어 프랑스와 노로돔 왕 사이에 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1864년6월 노로돔은 프랑스의 비호하에 공식적으로 왕위를 계승하고, 이후 프랑스는 캄보디아 식민정책을 계속 추진하였다.

프랑스의 식민지(1867~1941)
    1967년에 프랑스는 베트남의 3개 지방, 라오스와 함께 캄보디아를 프랑스의 인도차이나연방으로 편입하였다.

일본군의 지배(1941~1945)
    1941년 중반부터 일본군은 캄보디아에 새로운 사회기반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시아누크의 등장(1945년3월12일)
    왕권의 전통이 강한 캄보디아에서 왕으로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아누크(N, Sihanouk)는 1945년 3월 12일에 캄보디아의 독립을 선언하고 프랑스와 연계하여 일본군에 저항하였다. 프놈펜에 다시 돌아와 수상에 임명된 탄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천명하였고, 이에 따라 프놈펜에서는 왕당파와 반왕당파 간의 치열한 시가전이 전개되었다. 결국 프랑스군이 프놈펜을 탈환하고 국민의 지지를 받던 탄을 체포하여 프랑스로 압송하였다.

캄보디아의 독립(1947)
    시아누크는 프랑스에 대한 캄보디아의 충성심을 다시 확인하였다. 캄보디아는 프랑스와 8년간 긴 교섭 끝에 명목상으로 법적 독립과 정치적 자율성을 획득하여, 프랑스 연맹 내의 독립된 왕정국가로 인정받게 된다. 1947년 헌법을 공포하였다. 1953년 캄보디아는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었다.

시아누크의 중립정치(1960)
    시아누크는 1960년, 수라마리트(N, Suramarit)왕의 사후에 새로운 왕을 선정하기 전에 과도적인 조치로 국가주석을 두게 되었는데, 국민투표에 의하여 시아누크가 취임하게 되었다. 1965년까지 그는 반공주의자에서 중립주의자로, 때로는 공산주의자와의 협력자로서 이데올로기적 모험을 계속하였다.

론놀의 우익정치(1970)
    1970년 국가원수 시아누크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은 ‘론놀’은 1972년에 국명을 ‘크메르’로 개칭하였다. 그는 우익세력의 지지를 업고 수상에 추임하였다.

폴포트 공산정권(1975~1978)
    론놀 정권의 붕괴로 캄보디아에는 급진적인 공산정권이 들어섰는데, 캄보디아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정권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득 ‘크메르 루즈’라고 부르는데 이는 ‘크메르의 빨갱이’라는 의미이다. 1976년 이들은 나라이름을 ‘민주 캄보디아’로 개칭했다.

행삼린 공산정권(1979)
    1978년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공격하였고, 행삼린 군대를 선봉으로 한 베트남군 5개사단이 프놈펜을 입성하였다. 1979년 1월에 캄보디아 인민혁명 평의회는 캄보디아 인민공화국(The People’s Republic of Kampuchea)의 탄생을 선포하였다.

베트남군의 철수(1988)
    베트남군대는 1988년 캄보디아로부터 철수를 선포하고 그들의 영토로 되돌아갔다. 캄보디아에는 유엔에서 파병한 다국적 군이 이곳의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캄보디아와 대한민국 수교(1997년)
    캄보디아는 2004년 10월 29일 왕위에 오른 노르돔 사아모니(Norodom Sihamoni)국왕이 있고 정치는 국가수반인 캄보디아 국민단의 훈센(Hun Sen) 총리가 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1975년 국교단절후 1997년10월 30일 수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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