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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남 베트남 공산화와 한국-(2)
글쓴이 위더스관광 첨부파일 -
작성일 2015-12-28 오후 4:06:56 조회수 959
1975년 1월 베트남전에 관한 파리협정의 규정에 따라 약 8년 동안 베트남전에 참전하였던 우리 국군은 그 해 3월까지 완전 철수하였다. 그러나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이 공산화 통일이 되던 날 베트남 내에서는 여러 가지 상당수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다. 한국은 베트남전 참전국으로서 통일된 공산 베트남과 적대관계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북 베트남은 북한과 동일한 정치이념과 정치체제를 갖고 있는 우호국으로서 베트남에 남아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북 베트남과 북한으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베트남의 공산화는 1955년 10월 27일부터 가졌던 한국과 남 베트남과의 외교관계는 1975년 4월 30일을 기하여 단절되었다. 따라서 이후 한국과 베트남 양국의 대외정책의 전환이 없는 한 양국간의 교류는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베트남이 공산 통일을 한 1975년부터 1980년까지의 초기 5년간 통일 베트남뿐만 아니라 한국도 국내 정치와 북한과의 관계에서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이 기간 동안 베트남이 통일로 야기된 여러 가지 사항이 한국과 한반도 내에서 대략 두 가지 면에서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베트남의 공산화로 베트남 난민들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지원을 한국 정부와 한국인들이 해줌으로서 한국정부와 한국인들의 인도주의를 세계 여러 나라에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인의 연고를 갖고 있는 베트남 여인들에 대한 정부차원의 지원책이 미비하였기 때문에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 기업이나 개인들의 많은 재산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커다란 수출시장과 베트남 전후 개발을 위한 잠재적인 시장을 잃게 된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베트남의 공산화가 북한을 고무시켜 한반도에 전쟁을 일으킬 위험을 가져온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베트남의 공산화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를 다소 잠재울 수 있었고 베트남의 공산화는 한국의 안보를 강화할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베트남 공산화 직전에 우리 해군함정으로 베트남을 떠난 1335명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들과 연고를 갖고 있던 베트남인과 그 자녀가 656명이었고 순수 베트남인도 342명에 달했다. 부산시와 대한적십자사 부산지사는 1975년 5월 13일 우리 해군함정이 부산항에 입항하자 베트남 인들과 어린이를 구호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속한 시일 내에 이들의 국내 연고자를 찾아주고 순수 베트남인들의 제3국으로의 출국을 도와주었다. 5월 23일에는 우리나라의 삼양선박 소속의 화물선 트위드래곤호(선장 박명석)에 구조된 남 베트남 해군선박에 타고 있던 베트남인 216명이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이들 해상탈출난민들은 대부분이 해군과 그 가족들이었다.

나는 구조된 베트남 해군장교들과 박명석 선장과 여러차례 만나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박선장의 인도주의 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수 많은 선박들을 만났지만 모두 구조를 외면하였다고 말했다. 부산 적십자사의 발표에 의하면 1975년 5월 13일부터 상당수의 해외연고자를 가진 난민이 떠난 12월 20일까지 1562명을 수용, 구호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부산시와 부산 적십자사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의 협조 
아래 장기 수용 난민을 수용하고 새로운 해상난민을 보호하기 위해 부산시 해운대구 재송동 1005의 78변지에 영구 건물을 지어 1977년 9월 15일 부산 적십자 난민보호소를 개소함으로 한국은 난민 구호를 위한 국제적인 노력에 참여하게 되었다. 대한 적십자사의 발표에 의하면 1975년 5월 13일부터 부산 적십자사 난민보호소가 폐쇄된 1993년 2월 8일까지 18년 동안 베트남 난민 2944명을 수용, 보호하였다.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베트남 난민들이 한국인 연고자를 찾아 한국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한국인 남편들이 베트남 공산화 이전에 미국, 호주 등으로 간 다음 소식이 두절된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한국인 보호자를 가진 베트남 난민들이 난민수용소에서 출소를 꺼리는 경우도 많았다. 가장 문제가 된 경우가 베트남 난민이 수용소를 출소한 이후 한국인 남편의 가족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와 한국인 남편이 생활 능력이 없는 경우였다. 한국 정부는 베트남 난민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 정책이 없었다. 다만 대한적십자사나 지방행정기관의 단기적인 구호활동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보건사회부를 찾아가 생계가 어려운 베트남 난민에 대한 지원을 건의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다만 노동청(현재 노동청) 각 지방사무소는 관내 기업체에 이들 베트남 여인들의 취업을 적극 알선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부양 자녀를 가진 베트남 여인들은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동료 한국인 직원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직장에 근무하지 않고 생활비를 지급한 경우도 있었다.
내가 지금도 잊어버릴 수 없는 두 베트남 여인이 있다. 3자녀와 조카를 데리고 우리 해군 함정으로 한국에 온 유티수(Luu Thi Suu)여인은 뒤따라 온다던 남편은 오지 않았다. 시집에서 나온 이 여인은 면목동의 단칸방에서 동회에서 주는 쌀과 연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나를 찾아와 자신의 딱한 처지를 호소하기에 여기저기에 취업을 알선해주었으나 적응하지 못했다. 나는 이 여인에 관한 연말 불우 이웃 돕기 기사를 한국일보 사회면에 크게 보도하도록 하였다. 한국화장품의 임사장이 이 여인의 딱한 사정을 알고 한국화장품에 취업시켜 온 가족을 돌보아 주었다. 지금은 베트남으로 돌아간 것으로 알고 있다.
또 한 여인은 베트남 휴양도시인 다랏(Dalat)출신으로 당시 사이공대학 법대에 재학 중 한국인과 결혼하여 두 딸을 데로고 역시 우리 해군함정으로 한국으로 왔다.
그녀의 남편은 전화국(지금 한국통신공사)에 다니고 있었다. 남편과 시집 식구의 학대로 견딜 수 없어 두 딸과 가출하여 두 딸은 미군 기지촌으로 가고 자신은 정신이상으로 방황하였다. 1980년대말 대광초등학교의 박영삼 선생이 이 여인을 보호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다. 지금 그 여인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1982년 구정을 앞두고 전두환 대통령은 국내에 있는 어렵게 살아가고 있던 베트남 여성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저녁을 같이 한적이 있다. 나는 그 자리에 초청되어 베트남 여인들 이 나라에서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우리말로 통역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대령인 1970년 주 월 백마부대 연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였다. 전 대통령은 매우 가까운 베트남인 친구가 베트남이 공산화할 당시 한국으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하였는데 도와주지 못하여 안타깝다고 말하였다.
통일 베트남 정권은 1977년부터 이웃 공산 캄보디아 정부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 1978년부터 시작된 베트남 내의 화교에 대한 탄압으로 수 많은 화교가 해상으로 탈출하였다. 이들의 숫자는 50만명이 넘었다. 이들 보트피풀(Boat People)문제로 베트남은 동남아 국가들과 매우 좋지 않은 관계를 갖게 되었다. 한국은 베트남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베트남 난민문제로 인한 문제는 양국간에 없었다. 그러나 베트남 근해로 통과하는 우리나라 선박이나 우리나라로 향하는 외국국적의 선박에 의하여 베트남 해상탈출난민이 구조되어 한국에 상륙한 적은 있다. 1977년 9월 12일 리베리아 국적의 선박이 38명의 보트피풀을 구조하여 부산항에 입항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1979년 9월 12일 한국어선 오령 제 55호가 40명의 난민을 구조하여 부산항에 입항하였다. 또한 그해 9월 20일 영국국적의 선박 알라릭(Alaric)에 구조된 32명의 베트남 해상 난민을 인천항에 입항시킨 후 모두 홍콩으로 출국시켰다.




2003년 11월 02일 통권 제 19호
교민 잡지 김기태 교수의 나의 베트남 생활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