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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남 베트남의 공산화와 한국 - (3)
글쓴이 위더스관광 첨부파일 -
작성일 2015-12-28 오후 4:07:23 조회수 935
1975년 4월 30일 남 베트남의 공산화는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대치하고 있던 한반도
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다 주었다. 
크메르(오늘날 캄보디아)공화국이 공산화되던 1975년 4월 17일 북한 김일성 주석
은 14년만에 중공을 방문하고 중공 지도자들로 하여금 북한의 남한에 대한 침공을
승인하여 주도록 요청한 것으로 보였다. 뿐만 아니라 김일성은 1975년 3월 전쟁에
대비하여 100만톤의 양곡을 비축하라고 지사하였다. 당시 한국군은 휴전선의 비
무장지대에 북한이 판 땅굴을 발견함으로서 남.북간에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한반도 주변 정세는 김일성 주석이 무력 도발을 시도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
고 있었다. 즉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원의 감소와 주한 미군의 감축 움직임 등 
미국의 아시아 정책의 변화 움직임 뿐만 아니라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로 미군
이 동남아 지역으로부터 철수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한국전이 발발
했을 경우 미국이 한국을 지원할 의사가 없을 것이라고 김일성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기대와는 달리 중공은 미.중공 간의 데탕트와 소련의 아시아에서
의 영향력 확대 저지 등의 이유로 북한에 대한 지원을 거부 함으로서 김일성의
남침 기도는 실현되지 않았다. 한편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한국에서의 북한의 도발을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예를 들면 슐레진거 미 국방장관은 1975년 5월 1일 기자회견에서 인도차이나 반도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사태가 미국의 힘과 신뢰성에 대해 많은 우방들을 동요
시키고 있다고 미국으 한국에 대한 공약에 아무도 도전하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슐레진거 국방장관은 다시 5월 18일 ABC텔레비젼과의 대화에서 "만일 북괴가 남
침을 한다면 미국은 베트남전쟁때 취했던 것보다 휠씬 강력한 반격을 취할 것"이
라고 북한을 경고하였다.

1975년 5월 31일자 워싱턴포스트지의 보도에 의하면 포드 미국 대통령도 만일 
한국에서 게릴라전 형식의 북한의 공격이 있을 경우에도 한국에 대한 지원이 필요
하도고 인정될 때에는 그는 대통령직 뿐만 아니라 미국의 공신력을 걸고서라도
이를 실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남 베트남의 공산화 직전
인 1975년 4월 29일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박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베트남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들을 자세하게 언급
하고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는 우리에게 더 없이 귀중한 교훈을
가져다 주었다고 말하고 이번의 인도차이나 반도의 사태에 북한은 크게 고무되어
있으며 한반도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을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정부는 베트남의 공산화를 교훈으로 북한의 도발을 저지시키시 위해 대외적으로
자유우방 특히 미국과 적극적으로 군사적인 협려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
다. 아무튼 남 베트남의 공산화로 북한이 남한에 대한 무력도발을 시도하였지만
실행에 옮길 수 없었던 것은 한반도를 들러싼 강대국의 이해관계와 적극적인 정
부의 외교활동과 국민들의 확고한 안보의식에 기인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남 베트남의 공산화가 북한의 도발을 불러 올 것이라는 위기를 조서하여
박 대통령은 당시 유신체제에 대한 재야세력의 반대를 다소 잠재울 수 있도록
이용한 일면도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정부가 베트남 통일로 인한 일부난민들의 망국의 한을 우리 안보에 이용한
경우가 몇 가지있다. 이것은 국내에 피난한 베트남 난민들을 통해 정부가 국민
들에게 반공의식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직접 간여한 몇 가지 예
를 들어 본다. 부산 난민수용소에 수용된 베트남 난민들은 대한 적십자사, 유엔
고등판무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있는 대사관의 도움으로 난민 수용소에 도착한
직후부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국에 있는 연고자를 찾아 우리나라를 떠나기
시작하였다. 문공부(지금의 문화부와 국정홍보처)의 협조로 부산시(당시 시장
박영수)가 주최하여 1975년 8월 부산시만회관에서 가졌던 베트남 난민들에 대
한 환송식의 기획에서부터 행사가 끝날 때까지 나는 간여하였다. 베트남 난민
환송식의 모든 행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생방송으로 시청률이 가장 높은 시간대
에 TV를 비롯한 모든 보도매체를 통하여 전국에 동시 중계하였다.
당시 TV를 시청하고 라디오를 들은 우리국민들은 이들 베트남 난민들의 호소
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우리나라 문교부(지금은 교육부)주관으로 1975년 5월 23일 우리나라의 트윈
드래곤호에 의하여 구조된 216명의 남 베트남 해군 장교들을 통하여 전국 중,
고, 대학생들에 대한 안보교육을 실시하였다. 1975년 가을 우리나라에서 베트
남어를 잘 구사하는 인사들을 통역으로 초청하였다. 나를 비롯하여 국방부
이경렬 소령, 대림산업에 근무하던 김중방 부장 등이 참여하였다. 지금은 이름
이 기억 나지 않지만 나는 해군 대령의 통역으로 서울시내의 주요 각급 중.고등
학교와 대학을 순회하면서 남 베트남의 패망 원인을 설명하고 우리나라 젊은 
학생들의 안보의식을 강화하도록 호소하였다.

나와 같이 안보 강연을 한 남 베트남 해군 대령은 베트남을 떠나기 직전 부인을
잃고 두 아들을 데리고 탈출하였으며 지금 미국 텍사스주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국방부 정훈국에서는 1985년 당시 부산 난민 수용소에 있던 베트남 난민들에게
수기를 쓰게 하여 33인의 수기를 모아 "나라 잃은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1986년
6월 출판하여 국방부 정훈 참고 교재를 만드는데 내가 도와주었다.




2003년 11월 16일 통권 제 20호
교민 잡지 김기태 교수의 나의 베트남 생활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