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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남 베트남 공산화와 한국 - (1)
글쓴이 위더스관광 첨부파일 -
작성일 2015-12-28 오후 4:06:30 조회수 969
1975년 북 베트남군의 춘기공세에 의하여 남 베트남 정권은 무너지고 베트남은
1954년 제네바협정에 의하여 남북으로 분단 된지 20년만에 전국토가 공산주의
체제에 놓이게 되었다. 
북 베트남의 지휘 조정을 받고 있던 남 베트남내의 공산주의자들의 임시혁명
정부(PRG)지도자들은 독자적인 통치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 베트남
당국은 이를 용납하지 않고 긴급히 남.북 통합정부 수립작업에 착수하였다.
북 베트남 정치 지도자들의 주도하에 1976년 4월 25일 남.북 통일 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를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그 해 6월 24일 하노이에서 열린 국회
에서 하노이 당국자들은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7월 2일 전국토의
통일을 선포하고 국호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SRV)로 발표 하였다.

1976년 12월 14일부터 20일까지 개최된 제 4차 베트남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베트남 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당지도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 후 1977년
부터 이웃 캄보디아와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문제로 베트남은 중국과 긴장관계가 계속되었다. 1978년부터 시작된 베트남
내의 중국화교들에 대한 탄압으로 수많은 화교들의 중국으로의 탈출은 중국과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과거 자유주의 체제하에 있던 수많은 남 베트남인들
이 자유주의 국가로 이주하기 위하여 해상 탈출을 감행한 소위 보트피플 문제
로 베트남과 동남아 국가들 간의 관계가 긴장되었다.

드디어 1978년말 베트남군은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을 진격하여 이듬해 1월
7일 친 베트남 정권을 수립하였다. 베트남의 이러한 행동을 응징하기 위하여
중국정부는 1979년 2월 17일부터 3월 5일까지 베트남을 침공하여 베트남 국경
40km까지 침공해 들어갔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베트남은 통일이후 수년
동안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한편 한국은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선언으로 남.북한 간에 자주평화통일원칙
에 합의하였다. 곧 이어 그 해 10월 27일에는 비상국무회의에서 유신 헌법을
의결하고 국민투표에 붙였다. 새로운 헌법에 따라 12월 27일 박정희씨가 제 8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73년 이후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종신 집권을 허용한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었다. 1973년 8월8일 김대중씨의 피랍
사건이 발생하였고 1974년에 들어서면서 정부는 수 차례에 걸쳐 긴급조치를 발
동하여 많은 민주 인사들이 구속되었다. 그 해 8.15경축식에서의 박대통령의
저격사건으로 대통령 부인인 육영수여사가 사망 함으로서 국내정국은 매우 어
수선했다. 1975년 이후 몇 년 동안 정부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민주 인사들에
대한 탄압의 고삐를 늦출줄 몰랐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
정보부장인 김 재규가 쏜 총에 사망하였다.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최규하 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에 취임하였다. 그 해 1972년 미국과 중국의
화해 움직임 등 국제 정세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남북한간의 대화를 적극
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헌법을 개정하여 박정희씨의 영구 집권
기도로 국론이 분열되고 수많은 민주 인사들이 투옥되어 국론이 분열되는 불행
을 감수하지 않으며 안되었다.

1975년 4월 30일 북 베트남의 공산 정권에 의한 남 베트남의 흡수 통일로 정치
이념이 다른 한국과는 당연히 국교관계가 단절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
과 남 베트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냉전의 희생물로서 분단되었고 1956년
에 수교한 이후 자유민주주의를 이상으로 한 공동 운명체란 의식을 갖고 두나라
는 20년 동안 외교적으로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특히 베트남 전쟁기간
동안 한국은 미국의 지원으로 남 베트남군을 돕기 위해 한국군이 베트남 땅을 
밟았다. 주월 한국군의 숫자가 가장 많을 때는 상주 인원이 5만명에 이른 적도
있었다. 또한 5,000명이 넘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베트남 땅에서 아까운 생명을
바쳤다.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9년 동안 많은 우리나라의 대기업을 비롯
하여 중소기업들이 이 나라에 진출하여 경제활동을 했다. 그리고 수 많은 우리
나라의 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이 남 베트남을 다녀갔다. 1973년 1월 파리휴전협정
의 휴전후 60일 내에 외국군대의 철수 규정에 따라 한국군은 완전히 철수하여
1975년 4월 30일 남 베트남의 공산화 당시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수 많은 우리나라 기업들과 민간인들은 갑자기 모든 재산을 버리고 이 나
라를 탈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다시 베트남에서 살고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
은 삶의 터전을 버리고 목숨만 건지기 위해 온갖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남 베트남 정부가 공산군의 춘기공세로 몰락 위기에 있었던 1975년 4월 6일 2척
의 해군 LST로 한국교민 철수 작전을 수행한 박인석 대령은 그의 회고록 '바다는
태양을 띄운다."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우리의 작전명령은 난민구호를 위한 인도주의적 비무장 보급지원으로서 십자성
작전 수송 의무였다. 부산에 집결한 각부대가 모여 난민구호 및 교민철수 특별
수송분대를 구성하고 작전지휘부와 참보 그리고 지원병력이 계봉함과 북한함 2척
에 승선하여 임무별로 출사준비를 갖추었다. 박인석 대령은 구호품으로는 약400
만 달러치의 의류, 식품, 식량, 의약품 등이라고 말했다.
부산을 4월 9일에 떠나 12일간의 항해 끝에 4월 21일에 붕따우에 도착했고 다음날
22일에 사이공 뉴포트 항에 입항했다. 해군 LST 계봉함과 북한함은 갑자기 긴급
히 출항하라는 지시를 받고 구호품 인도를 중단하고 북한함은 한국교민과 친한
베트남인들을 탑승시키고 계봉함에는 주월 대사관 직원들의 귀국짐과 베트남 
난민들의 짐을 실었다. 북한함은 4월 26일 사이공항을 먼저 떠나고 계봉함에는 
중국계 난민 570명과 그들의 짐을 싣고 푸꾸옥섬으로 떠나라는 지시를 받았다.
박인석 대령의 계봉함과 또 다른 북한함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1975년 5월
13일 부산항에 무사히 도착함으로서 우리 교민과 베트남 난민 1,335명의 수송작전
을 성공리에 마쳤다. 



2003년 10월 12일 통권 제 18호
교민 잡지 김기태 교수의 나의 베트남 생활에서 발췌